영국에 "폭풍의 언덕"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토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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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폭풍의 언덕"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토지"가 있다.


세계 문학의 거장들이 남긴 명작을 접하다 보면 문득 우리 문학의 위대함을 새삼스럽게 재발견하는 순간이 있다.
최근 에밀리 브론티의 고전 폭풍의 언덕을 다시 접하며 나에게는 그런 강렬한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왔다.
영국의 황량한 요크셔 무어를 배경으로 한 그 강렬한 비극 속에서 나는 역설적이게도 한국 문학의 거대한 봉우리인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위대함을 더욱 크게 느꼈다.
두 작품을 바라보면 서사의 규모와 깊이 그리고 인간을 담아내는 그릇의 크기 면에서 확연한 차이가 드러난다.

에밀리 브론티의 폭풍의 언덕은 언쇼 가문과 린턴 가문을 중심으로 한 2대에 걸친 복수와 파멸의 이야기다.
히스클리프라는 인물이 품은 광기 어린 사랑과 집착은 독자를 압도하는 힘이 있지만 그 무대는 요크셔의 외딴 저택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에 머무른다.

반면 박경리의 토지는 서사의 스케일부터가 비교를 불허한다.
경남 하동 평사리의 대지주인 최참판댁 가문을 중심으로 무려 5대에 걸친 흥망성쇠를 다루기 때문이다.
공간적 배경 역시 한반도의 평사리와 진주 통영을 넘어 만주 용정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도쿄까지 넓게 확장된다.

폭풍의 언덕은 인간 내면의 어두운 본성과 집착이 불러오는 격정적인 심리 드라마다.
반면 토지는 격동의 세월 속에서 개인이 겪어야 했던 운명과 민중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한의 미학으로 풀어낸 민족의 거대한 파노라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서사의 차이는 두 작품이 품고 있는 인간 세계의 넓이 즉 등장인물의 숫자에서도 극명하게 대비된다.
폭풍의 언덕은 아주 세부적인 단역과 하인들까지 모두 합쳐도 대략 30여 명 안팎이다.
이야기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핵심 주연급 인물은 10명에서 12명 내외에 불과하다.
인물 관계가 좁고 깊은 만큼 밀도 높은 감정을 전달하지만 한 시대를 대변하기에는 명확한 한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한국 문학사상 가장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소설 토지는 차원이 다르다.
작중에서 이름이 한 번이라도 언급되거나 제 역할을 하는 인물을 모두 합치면 무려 600여 명에 달한다.

구한말의 혼란기부터 1910년 경술국치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에 이르기까지 약 50여 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가문의 3대에서 4대 역사가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고설키며 전개된다.
보기 방식에 따라서는 가문의 영욕이 5대에 걸쳐 흘러가기도 한다.
폭풍의 언덕이 한 가문의 뒤틀린 역사에 집중할 때 토지는 수백 명에 달하는 인간 군상의 삶을 통해 시대를 관통하는 거대한 서사를 완성해 내는 것이다.

결국 두 작품은 문학이라는 그릇에 무엇을 담았는가라는 본질적인 가치에서 궤를 달리한다.
폭풍의 언덕은 사랑과 증오라는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이 어디까지 치달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고전이다.
하지만 토지는 한 가문의 역사를 넘어 일제강점기라는 가혹한 식민지 시대를 온몸으로 버텨낸 민중들의 눈물과 투쟁 그리고 삶을 향한 집념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인물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쉬는 역사이며 그들의 대화와 갈등 속에는 우리 민족의 혼이 녹아 있다.

세계적인 명작인 폭풍의 언덕을 접하며 우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위대함을 다시금 떠올리는 것은 결코 과장이나 애국심에 기댄 것이 아니다.
오히려 텍스트의 양과 질 서사의 확장성 면에서 토지가 보여주는 문학적 성취는 세계 어떤 문학과 비교해도 우뚝 솟아 있다.

우리에게 토지라는 자산이 있다는 것은 한국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축복이자 자부심이다.
원고지 4만 장이 넘는 이 거대한 세계를 수십 년에 걸쳐 홀로 창조해 낸 박경리 작가님, 그가 남긴 업적 앞에 깊은 경외심이 솟구치며 작가님을 향한 존경심이 마음속에서 묵직하게 자라남을 느낀다.

사실 과거에 토지를 읽거나 드라마로 보았을 때도 이렇게 크게 감동을 주지는 않은 거 같다.
그냥 우리 부모들 의 살아온 삶을 보여주는 것 같아 그런가 보다 하는 면이 더 컸다.
원주에 있는 토지 문학관을 문우들과 함께 관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번에 에밀리 브론티의 워더링 하이츠(폭풍 위 언덕)를 접하며 마음이 격정이 일고 있는데 오늘 아침 @jjy의 "소설에 깃든 詩 - 박경리/ 토지 184."포스팅을 보면서 그간 크게 느끼지 못했던 그 무엇이 확 들어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마치 소중한 것인 줄 도 모르고 있다가 어느 기회에 소중함을 아는 것처럼 그렇게 말이다.

2026/10/11
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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