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마지막 처방전
인생의 마지막 처방전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온 세상이 가을이다. 붙잡을 새도 없이 성큼 다가온 계절은 산과 들뿐만 아니라 내 몸과 마음 구석구석까지 깊숙이 스며들었다. 어딜 가나 완연한 가을이고, 그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가을 그 자체다. 계절이 바뀌듯 내 안의 온풍도 어느새 서늘하고 담담한 가을의 기운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느낀다. 세월이란 게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드는 계절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처방전을 받아 들었다. 온몸이 뜨겁던 청춘의 날들, 마음의 병을 앓을 때마다 우리는 그것을 고쳐보겠다고 '열정'이라는 독한 약을 삼켰고, '사랑'이라는 달콤한 처방에 매달렸으며, 때로는 '성공'이라는 영양제를 찾아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그 시절의 약들은 대개 자극적이었고, 즉효를 바라는 조급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런 약들로도 쉽게 가라앉지 않던 삶의 열병과 흉터들이 있었다.
도저히 해결되지 않을 것 같던 그 아픔과 묵직한 고민들을 치유해 준 것은 결국 전혀 다른 종류의 약이었다. 옛 노래의 가사처럼 정말로 세월이 약이었던 셈이다. 모진 바람을 견뎌낸 나무가 가을이 되어 비로소 상처 속에서 키워낸 열매를 아낌없이 떨구고, 담담한 알몸으로 돌아가 스스로를 비워내듯이, 우리 삶의 상처와 서글픔을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잔잔하게 어루만져 주는 영험한 약은 결국 흐르는 시간뿐이었다. 젊은 날의 처방전들이 상처를 덧나게 하거나 일시적으로 통증을 잊게 하는 임시방편이었다면, 세월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전한 본연의 나로 돌아가 도달하는 유일한 치유였다.
이제야 깨닫는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의 끝자락에서 우리가 받게 되는 마지막 처방 약은 다름 아닌 세월이라는 것을. 그 처방전은 어떤 명의도 지어줄 수 없는, 오직 삶을 묵묵히 살아내고 견뎌낸 이들만이 손에 쥘 수 있는 은총이자 선물이다.
주머니 속을 가만히 만져본다. 이미 내 손에는 그 묘하고도 아련한 처방전이 들려 있다. 젊은 날의 처방전처럼 화려하지도, 빠르게 효과가 나타나지도 않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가라앉히는 묵직한 종이 한 장. 남은 시간이 지나온 시간보다 짧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 한편에는 묘한 외로움이 일기도 하지만, 이 마지막 처방전을 받아 든 이상 더는 무언가를 채우려 애쓰거나 세월을 쫓아가며 숨 가빠할 필요가 없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낙엽이 지면 지는 대로, 그저 내게 주어진 가을을 온전히 누리면 그만이다. 처방된 약을 달게 삼키듯, 흘러가는 세월을 잔잔한 미소로 받아들이며 그렇게 나만의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싶다. 몸도 마음도 온전히 가을이 되어가는, 참 묘하고도 고마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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