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들을 만나고 느끼는 감정
전우들을 만나고 느끼는 감정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이 자명한 명제 앞에 예외는 없다.
죽음이 두려워 매일 밤을 지새우든, 혹은 담담하게 받아들이든, 우리의 감정은 다가오는 죽음의 발걸음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죽음은 봉인된 예정된 순리대로 우리를 향해 걸어올 뿐이다.
지난 주말에 오랜만에 옛 전우들과 모임을 가졌다.
가슴 뜨거웠던 시절을 함께 통과한 이들이기에 만남 자체는 반가웠지만, 문득문득 서글픈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호기롭던 청춘의 기상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서로가 확연히 늙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어버린 탓이다.
과거의 찬란했던 무용담 대신, 서로의 거칠어진 손을 잡으며 “요즘 어디 아픈 데는 없나”, “무조건 건강해야 하네”라며 건강에 대한 걱정 어린 말들만 무겁게 오갔다.
거울 속 내 모습처럼 깊어진 전우들의 주름살을 보며, 나는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시간의 속도를 처연하게 실감했다.
돌아오는 길, 깊은 상념 끝에 문득 마음 한구석에서 고요한 울림이 일었다. 마냥 젊을 줄만 알았는데, 이제는 부인할 수도 부인되지도 않는 세월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한편으로는 감사한 일이다.
그 치열했던 세상 풍파 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이만큼의 세월을 벼텨내어 마침내 인생의 깊이를 음미할 수 있는 나이에 도달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부인할 수 없는 눈가의 주름과 흰머리는 초라함의 증거가 아니라, 우리가 삶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성실히 살아냈다는 가장 정직한 훈장이다.
그러나 이 세월의 궤적 속에서도 기묘한 차이는 존재한다.
바로 ‘언제, 어떤 모습으로 죽는가’에 따라 남은 자들이 던지는 시선과 평가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인생의 황금기, 이른바 가장 잘나갈 때 찾아온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깊은 아쉬움을 토해낸다. 반대로 삶의 무게에 짓눌려 상황이 좋지 않을 때 맞이한 죽음에는 가슴 먹먹한 안타까움을 보낸다.
가혹하게도, 삶의 존엄마저 잃어버린 채 무너진 이의 죽음 앞에서는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잘 죽었다”는 냉정한 냉소가 흐르기도 한다.
타인의 죽음을 바라보는 산 자의 마음은 이토록 잔인할 만큼 솔직하다.
전우들과 건강을 염려하며 나눈 대화의 밑바닥에도, 결국 ‘초라하게 무너지지 않고 인간다운 존엄을 지키다 가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깔려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대체 정말 ‘잘 죽는 것’이란 무엇일까.
진정으로 잘 죽는다는 것은, 죽음을 단순히 생명이 소멸하는 비극이 아니라 내 삶의 모든 서사를 닫는 가장 숭고한 ‘완결편’으로 만드는 일이다.
우리는 책을 읽을 때 마지막 장의 마침표가 찍힌 후에야 비로소 그 책이 가진 진정한 메시지를 이해한다.
인간의 삶도 이와 같지싶다.
죽음이라는 마지막 페이지가 어떻게 장식되느냐에 따라, 앞서 살아온 모든 방황과 성취, 그리고 전우들과 나누었던 뜨거운 기억의 조각들이 비로소 하나의 아름다운 궤적으로 묶이게 된다.
잘 죽는 것은 결국 ‘남겨진 기억의 온도’로 증명된다.
지나온 세월을 감사함으로 품어 안은 사람의 뒷모습은 주위를 따뜻하게 물들인다.
아무런 흔적도, 온기도 남기지 못한 채 냉소 속에 잊히는 죽음이 아니라, 내 마지막 호흡이 멈춘 자리에 전우들과 가족들의 깊은 그리움이 피어날 수 있다면 그것은 성공한 삶의 마무리가 아닐까.
늙어가는 육신과 다가오는 병마를 두려워하며 도망치기보다, 부인할 수 없는 이 세월을 묵묵히 긍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오늘 마주한 이들에게 따뜻한 눈길을 한 번 더 건네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유산을 남기는 것.
그리하여 우리의 죽음이 삶의 초라한 퇴장이 아닌, 존엄하고 숭고한 마침표가 되게 하는 것이리라.
세월을 감사히 여길 줄 아는 이 품격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해야 할 진정한 완결의 모습이 아닐까싶다.
2026/10/19
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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