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페이지의 인생, 그리고 남겨진 사람 냄새
몇 페이지의 인생, 그리고 남겨진 사람 냄새
박경리 선생이 남긴 "평생을 살았지만 내 삶을 정리하면 결국 몇 페이지 되지 않는다"라는 말은 가슴에 잔잔한 균열을 일으킨다.
거대한 문학의 산맥을 이룬 이조차 자신의 한평생을 겨우 몇 장의 종이로 요약했다면, 범인의 삶은 어떠할까.
나 역시 내가 걸어온 길을 받아 적는다면 과연 몇 줄이나 채울 수 있을지 가만히 헤아려보게 된다.
파란만장한 영웅담도, 세상을 들썩이게 한 거창한 업적도 없으니 어쩌면 단 한 페이지조차 과분할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참으로 허망하고 덧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탄식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얼마 전 생각하는 의자에 앉아 문득 지나온 날들을 가만히 짚어보았다.
치열하게 달렸고, 매 순간 나름의 최선을 다했기에 "참 열심히 살아서 행복했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이 말하는 잣대를 들이대면 고개가 조금 숙여진다.
남들 눈에 번쩍이는 부와 명예를 거머쥐지 못했으니, 어쩌면 성공한 인생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당연하지만 씁쓸한 자각이 고개를 든다.
열심히는 살았지만 잘 살았는가에 대한 확답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세상은 언제부터인가 영악하게 계산기를 두드리고 매끄러운 가면을 쓰는 사람들을 현명하다며 성공의 반열에 올렸다.
진심을 다하는 솔직함은 미련함으로 치부되고, 상처받지 않으려 마음을 걸어 잠근 채 남들의 눈치와 기준에 맞춘 한 편의 연극 같은 삶이 성공한 삶으로 포장되곤 한다.
만약 그런 화려한 모습만이 성공의 척도라면, 투박하고 거칠지언정 내 안의 사람 냄새를 지키려 했던 나의 여정은 실패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노년이라는 계절의 문턱에서 바라보는 인생은 조금 다른 색을 띤다.
억겁의 세월 속에서 인간의 백 년이란 그저 먼지 같은 촌각일 뿐이다.
저 하늘의 별빛조차 제 명을 다하면 사라지는 뜬구름과 같다.
이 찰나의 시간 속에서 몇 페이지의 글귀로 요약되는 삶의 부피가 무슨 대수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성공에 대한 미련 아닌 미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거창한 나만의 성공을 바라기보다, 주변과 '함께하는 성공'으로 아쉬움을 벗어던질 수 있다면 그것이 진짜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싶다.
남들의 기준에 맞춘 화려한 서사는 없을지라도, 이웃과 곁의 사람들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성공이 내 삶의 페이지에 응원으로 채워진다면 더없이 좋겠다.
똑똑하고 잘난 것보다 따뜻한 심지로 주변을 밝히고, 인연의 소중함을 아는 것.
그것이 비록 세상의 성공 기준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매일 작은 꿈이라도 품어 열심히 살아간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지 싶다.
인생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평생을 정리한 페이지가 얇다고 해서 그 깊이까지 가벼운 것은 아니다.
비록 세상이 말하는 성공은 아닐지라도, 사람 냄새를 잃지 않고 늘 꿈을 품고 살아간다면 그 자체로 충분히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닐까.
오늘도 생각하는 의자에 앉아, 평생을 열심히 달려온 나 자신에게 나지막이 위로의 말을 건네본다.
"너, 지금껏 잘하고 있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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