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령의 시간에 만난 웃픈 이야기
정령의 시간에 만난 웃픈 이야기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든 이른 새벽, 나는 세상의 소음이 완전히 소거된 강가의 드넓은 잔디 광장을 홀로 걸었다.
마침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감긴 눈이 번쩍 들 만큼 아주 신선했다.
가로등 불 빛들이 여기저기서 불을 밝히고 있는 탓에 하늘의 별이 그리 많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막한 새벽하늘에 듬성듬성 빛나는 별들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자니, 어쩐지 그 녀석들이 방금 내가 흘린 헛웃음을 따라 같이 킥킥거리며 웃어주는 것 같았다.
새벽공기가 주는 특유의 경건함과 우주적인 연대감이 어우러져, 사뭇 신성한 기운이 잔디 광장을 잔잔하게 감싸 안았다.
이 성스러운 정령의 시간에 산책에 동행한 것은 다름 아닌 19세기 서양의 단편 소설 《한 시간 동안의 이야기》였다.
철도 사고로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멀쩡히 살아 돌아오자, 기쁜 게 아니라 겨우 맛본 ‘자유’를 빼앗긴 절망감에 숨져버린 여인의 이야기다.
참으로 지독한 블랙코미디다.
아내가 죽으면 남편이 화장실에 가서 몰래 웃는다는 우리나라의 짓궂은 우스개 소리가 시공간을 초월해 서양의 침실 창가에서도 고스란히 재연되고 있었던 셈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에게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란 이토록 본능적이고 눈물겨운 열망이었던가.
우주의 신비와 인간의 유쾌한 역설에 취해, 나는 새벽하늘의 오랜 길잡이이자 중심인 북두칠성을 찾아 북쪽 하늘을 엄숙하게 올려다보았다.
이 신성한 사색의 시간을 완성해 줄 거대한 국자 모양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새벽 5시가 다 되어 가도록 눈을 씻고 아무리 찾아도 북두칠성이 도통 보이질 않는 것이었다.
도시 불빛 때문인가?
아니면 내 눈이 침침한가?
한참을 헤매다 깨달았다.
계절과 시간에 따라 북두칠성이 지평선 아래로 아주 낮게 깔리거나 완전히 숨어버리기도 한다는 천문학적 사실을 말이다.
국자 손잡이조차 구경할 수 없었던 건 우주의 신비가 아니라 그저 계절과 새벽녘의 타이밍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하늘의 별들이 다시 한번 나를 보고 피식 웃는 것 같았다.
소설 속 여인은 단 한 시간의 자유를 맛보고 허망하게 떠났고, 나는 이 고요한 새벽녘에 호기롭게 우주의 기운을 느끼려다 지평선 뒤로 숨어버린 별자리와 숨바꼭질을 한 꼴이 되었으니 말이다.
어느덧 새벽 4시를 넘어 5시가 다되어 가니 밝으려면 아직 멀었지만 하늘은 어스름하게 밝아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비록 북두칠성은 찾지 못했지만, 차가운 새벽바람과 나를 보며 기꺼이 비웃어주던 별들, 그리고 한 시간에 삶과 죽음을 오간 여인의 황당한 비극까지 삼박자가 어우러진 참으로 ‘웃픈’ 새벽이었다.
인간의 완벽하지 못한 삶도, 가끔은 이렇게 삼류 코미디처럼 흘러가기에 되레 신성하고 아름다운 게 아닐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데, 남편의 난 자리에서 자유를 보고 들어온 자리에 절망한 여인의 이야기는 새벽 별마저도 졸음에서 번쩍 깨어 나 웃픈 모습을 흘려 강물에 떠내려 보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2026/10/12
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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