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만에 다시 만난 ‘늑대와 춤을’
언젠간 다시 보고 싶었다.
네불릭스나 디즐리나 항상 영화를 가까이에서 선택적 감상을 할수 있는 세상이다.
가끔은 편안한 세상이다 하고 생각하지만 뭔가 풍요속에 극심한 가뭄을 느끼기도 한다.
다시 바라본 인간과 문명, 그리고 세월
35년 만에 영화 ‘늑대와 춤을’을 다시 보았다.
1991년 처음 보았을 때의 감동이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 있었기에,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영화의 내용만큼은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를 다시 보는 동안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내 기억 속의 영화와 눈앞에서 펼쳐지는 영화가 상당히 달랐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큰 줄기는 그대로였다. 남북전쟁의 영웅 존 J. 던바 중위가 서부의 외딴 요새로 떠나고, 그곳에서 수우족을 만나 그들의 삶에 동화되어 마침내 ‘늑대와 춤을’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살아가게 되는 여정이다.
하지만 그 여정을 이루는 수많은 장면은 낯설었다. 분명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던 영화인데도 처음 보는 듯한 장면이 적지 않았고, 어떤 장면은 내가 기억하던 내용과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다.
기억이란 참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지난 35년 동안 영화 ‘늑대와 춤을’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기억하고 싶은 장면들만 골라 마음속에 또 하나의 영화를 만들어 놓고 있었던 것일까.
기억이라는 것이 반드시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지나간 일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지고, 어떤 부분은 사라지고, 어떤 부분은 자신도 모르게 덧칠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기억이 정확하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돌이켜보면 사람과의 관계도 그랬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서운했던 일, 억울했던 일, 내가 옳았다고 믿었던 일들 가운데 실제와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얼마나 많을까. 어쩌면 상대방은 전혀 다른 기억을 품고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오래된 영화 한 편이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내 삶을 비춰보는 거울처럼 느껴졌다.
처음 보았을 때의 ‘늑대와 춤을’은 광활한 대평원과 아름다운 자연, 백인 장교와 수우족의 만남, 문명과 자연의 충돌을 그린 장대한 서사였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말을 타고 달리는 사람들, 늑대 하얀 발과 던바 중위의 교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그러나 다시 본 영화는 달랐다.
이번에는 아름다운 풍경보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영웅의 모험보다 인간의 본성이 더 깊이 들어왔다.
특히 인간의 무자비성과 천박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들은 오래도록 마음을 무겁게 했다.
백인 병사들은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않는 늑대 하얀 발을 재미 삼아 총으로 쏘고, 던바 중위가 아끼던 말 시스코마저 죽인다. 그들에게 다른 생명의 고통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자신들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엄성 또한 존중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더욱 섬뜩한 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문명인이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총과 군복, 국가와 법이라는 이름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오히려 가장 원초적인 폭력성을 드러낸다. 반면 그들이 야만인이라고 부르던 수우족은 자연의 질서를 존중하며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간다.
물론 수우족 역시 인간의 갈등과 폭력에서 자유로운 존재는 아니었다. 영화 속에서도 부족 간의 전쟁과 죽음이 등장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단순히 백인은 악하고 원주민은 선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누가 문명인이고 누가 야만인인가를 묻고 있는 듯했다.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는 그 장면들을 백인들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영화적 장치 정도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습이 특정한 시대나 민족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어두운 본성처럼 느껴진다.
사람은 자신보다 약한 존재 앞에서 얼마나 쉽게 잔인해지는가. 자신이 가진 힘을 정당하다고 믿는 순간 얼마나 오만해질 수 있는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숱한 사건을 지켜보았다. 세상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인간의 마음도 그만큼 성숙해졌는지는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150여 년 전 북아메리카 대평원에서 벌어졌던 폭력과 약탈은 과연 지나간 역사의 한 장면일 뿐일까.
오늘날에도 전쟁은 계속되고, 힘을 가진 자들은 정의와 평화를 말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짓밟는다. 무기는 더욱 정교해졌고 문명은 더욱 발전했지만, 그 무기를 사용하는 인간의 탐욕과 오만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어쩌면 진정한 야만은 문명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라 다른 생명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마음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던바 중위가 수우족에게 다가가는 과정도 새롭게 보였다.
그는 처음부터 그들을 이해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속한 세계의 기준으로 그들을 바라보았고, 낯선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생활을 함께하고, 서로의 마음을 알아가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그는 수우족을 자신의 방식으로 바꾸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변해 갔다.
처음에는 그 변화가 낭만적으로 보였지만, 이제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사람은 경험이 쌓이고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진다고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살아온 경험을 지나치게 믿으면서 생각이 굳어지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데 인색해지기도 한다.
나 역시 그런 모습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내려놓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오랫동안 쌓아 온 경험과 판단이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던바 중위는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 밖으로 나갔을 때 비로소 다른 삶의 가치를 발견했다.
그가 수우족에게 얻은 이름 ‘늑대와 춤을’은 그래서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 이름은 단순히 백인 장교가 수우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의미를 넘어, 자신을 규정하던 신분과 편견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계 속에서 다시 태어났다는 상징처럼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변한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만 결코 같은 사람은 아니다. 좋아하던 것이 달라지고, 중요하게 여기던 가치도 변했다. 한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을 이제는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다툼이 지금은 부질없게 느껴지고, 끝까지 붙들고 싶었던 일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별것 아닌 것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음속 어딘가에 변하지 않는 ‘나’가 있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無常)이란 어쩌면 이처럼 평범한 삶의 경험 속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억도 변하고 생각도 변한다. 사람과의 관계도 변하고,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나 자신도 끊임없이 달라진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데 우리는 변하지 않기를 바라고, 영원히 내 것일 수 없는 것들을 붙들고 살아간다.
특히 자신의 생각과 기억에 대한 집착은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내가 옳았다는 생각, 상대가 잘못했다는 기억, 오래전에 받았던 상처까지도 마음속에 간직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그 기억조차 불완전한 것이라면, 그것을 근거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일은 얼마나 허망한 것일까.
35년 만에 다시 본 영화가 내게 던진 물음은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그토록 확신하며 살아온 것들 가운데 과연 얼마나 많은 것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일까.
불교에서 말하는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도 결국 자신을 중심에 놓고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자신의 욕망을 위해 다른 생명을 해치고,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배척하며,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믿는 순간 인간은 쉽게 잔인해진다.
그렇기에 자비란 단순히 누군가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만은 아닐 것이다. 나와 다른 존재도 나와 마찬가지로 고통을 느끼고 행복을 바라는 생명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늑대 하얀 발과 던바 중위가 조금씩 거리를 좁혀가는 장면이 새삼 아름답게 느껴졌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서로 다른 존재가 경계심을 내려놓고 가까워지는 데에는 거창한 말이나 약속이 필요하지 않았다. 기다림과 이해, 그리고 상대를 해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었을 뿐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도 필요한 것은 그런 마음일 것이다.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세상의 이치를 모두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살아온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적은지,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들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조금씩 깨닫게 된다.
젊은 날에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고,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가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부당한 일 앞에서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의 판단 역시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한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과 자신만이 옳다고 믿는 것은 분명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세 시간을 조금 넘기는 비교적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마지막 자막이 오를 때가 되자, 이렇게 긴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아쉬움이 남았다. 영화가 끝났다는 것이 아쉽고, 던바 중위와 수우족의 이야기를 더 지켜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어느새 새벽 한 시가 지나 있었다.
35년 전의 감동을 그대로 되찾지는 못했다.
대신 그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처음에는 광활한 대평원과 한 인간의 극적인 삶에 마음을 빼앗겼다면, 지금은 그 속에 담긴 인간의 잔혹함과 따뜻함, 탐욕과 자비, 그리고 서로 다른 존재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오래된 영화를 다시 본다는 것은 어쩌면 지나간 작품을 감상하는 일이 아니라, 그 작품을 처음 만났던 시절의 자신과 다시 마주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35년 전의 나는 던바 중위가 ‘늑대와 춤을’이 되어가는 여정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35년이 흐른 오늘, 나는 그 영화를 다시 보면서 그동안 나 자신이 얼마나 변해 왔는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영화는 그대로인데 그 영화를 바라보는 나는 달라져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세월을 살아갈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남은 시간만큼은 내가 옳다고 믿는 것들을 조금 덜 붙들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고 싶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않고, 힘없는 존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며, 가능하다면 누군가에게 상처를 남기기보다 작은 위로라도 건네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이 거창한 깨달음은 아닐지라도 지금의 내가 삶에서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자비일 것이다.
35년 만에 다시 만난 ‘늑대와 춤을’은 내게 오래된 영화 한 편 이상의 의미를 남겼다.
기억은 믿었던 것만큼 정확하지 않았고, 인간은 생각했던 것보다 잔인했으며, 그럼에도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려는 마음에는 여전히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확신이 많아지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를 알아가면서 다른 생명의 아픔에도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정말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으셨네요..
동일한 것이어도 언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이 많이 달라지는 거 같습니다.
0.00 SBD,
0.69 STEEM,
0.69 SP
[booming-kr-auto]
보팅 완료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