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0-7 박정희 격하시도의 의도와 강요된 분열에서 벗어나기
인간의 안목은 현상의 본질을 어떻게 파악하는가에 따라 그 수준이 갈린다고 하겠다. 현상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그런 다양한 모습에서 본질이 무엇인가를 밝혀 나가는 것이 학문이고 지혜일 것이다. 학문에서 반증가능성이란 아마도 그런 의미 때문에 나온 말일 것이다. 다양한 현상과 해석의 가능성에서 무엇에 촛점을 맞추는가는 개인의 가치관과 인생관 역사관 등 모든 것이 동시에 작동한다.
최근 암살자(들)을 중심으로 갑자기 박정희에 대한 일종의 격하운동이 벌어지다가 강력한 반발로 주춤하고 있다. 박정희에 대한 격하운동은 주기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영화를 중심으로 이런 경향은 두드러지는데 ‘암살자(들)’ 이전에는 ‘남산의 부장들’이 대표적이었다.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중요한 문제다. 역사적인 평가를 위해서는 일정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최근들어 박정희에 대한 기획된 격하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직접적으로 박근혜를 견제하기 위한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최근들어 영남지역에서 박근혜는 정치적 영향력을 상당부분 회복했다. 별로 한 것도 없이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 박근혜가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한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박근혜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두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박근혜의 탄핵이 이유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는 모두 미친것처럼 박근혜 탄핵을 주장했지만, 지금와서보니 박근혜가 탄핵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최근의 대통령중에서 박근혜가 가장 자주적이었다는 점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문재인과 이재명은 친미를 넘어서 종미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이재명은 역사적으로 매국노라고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모든 짓을 다하고 있다. 여전히 이재명을 감싸고 도는 자들도 매국노라는 역사적 비난을 받을 것이다. 조만간 매국노열전이 만들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 철없는 소위 보수적 경향의 사람들이 한동훈을 마치 새로운 구세주처럼 떠받들고 있지만, 그는 문재인과 이재명을 한술 떠 뛰어 넘는 종미주의자에 불과하다. 한동훈은 민족의 이익을 우선에 두는 보수적 가치와 전혀 상관이 없다. 한동훈은 노무현을 비판해도 박정희를 옹호하지 못한다. 자신이 박근혜를 탄핵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한동훈도 매국노라고 기록할 것이다.
박근혜가 탄핵될 정도라면, 문재인과 이재명도 지금 탄핵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둘째는 박정희의 후광이다. 국가의 경제상황 특히 서민의 경제사정이 어려워질수록 박정희에 대한 향수는 커진다.
이런 점에서 박정희를 어떻게라도 흠집을 내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하겠다.
필자가 박정희를 소환한 것은 학문적 평가 때문이 아니라 지정학적 대격변을 넘어가기 위한 정치적 이념의 기반으로 박정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릇 모든 인간은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박정희도 다양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젊었을 때 만주군에 들어갔으니 친일파라고 비난을 받을 수도 있고, 정적을 탄압했고 그 와중에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었으니 잔혹한 독재자란 비난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박정희는 분명 이제까지 대통령 중에서 가장 자주적인 정치지도자였고, 오늘날 한국의 번영의 초석을 닦은 위대한 성과를 남긴것도 사실이다. 등소평은 모택동을 공7과3이라고 평했는데, 그의 기준에 따르면 박정희는 모택동보다 훨씬 후한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모택동의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으로 죽은 사람은 수천만명에 이른다.
박정희에 대한 주기적인 비난과 격하시도에는 일정한 기획이 존재한다는 의심을 하고 있다. 한국을 지배하기 위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박정희와 같은 지도자가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5.16이 미국 CIA의 기획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런 주장은 신뢰성이 떨어진다. 권력을 장악한 이후 박정희는 미국으로부터 상당한 견제를 받았다. 설사 미국이 개입했다고 하더라도 권력을 장악한 이후 박정희는 미국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박정희의 국가발전모델은 미국식과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오히려 사회주의 국가의 발전방식과 유사했다. 박정희의 국가발전방식은 오히려 스탈린의 국가발전방식과 유사했다. 경제기획원이라는 것 자체가 소련의 ‘고스플란’과 기능과 역할이 비슷했다. 당시 미국에서도 박정희가 사회주의적 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한다는 비난과 우려가 적지 않았다.
박정희보다 더 자주적인 정치지도자가 있었던 것 같지 않다. 필자가 박정희를 소환한 것은 그의 자주적인 국가운영 철학때문이다. 자주적인 의지는 민족주의의 기본이다. 박정희를 민족주의자의 계보에 세우는데 그 어떤 하자도 없다고 하겠다. 박정희보다 더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정치지도자가 있다면 예를 제시해보라. 한국에서 민족주의적 지도자라고 한다면 박정희와 박근혜이외에 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필자가 박정희와 김일성의 역사적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지정학적 대격변을 이겨나갈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우리 역사상 가장 자주적인 정치지도자였다. 김일성은 한국전쟁이 한창일때 허가이를 위시한 소련파를 과감하게 숙청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마자 중국군을 철수시켰다. 중국군은 철수를 하지 않으려 했다.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철군하지 않으려 하는 중국군을 몰아냈다. 그 이후 중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연안파를 숙청했다. 조선이 지금과 같이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김일성의 숙청덕분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필자는 현재 전개되고 있는 지정학적 대격변을 이겨나가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적 가치관에 입각한 자주적인 국가의 건설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굳이 신민족주의라고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견지해야할 민족주의적 가치가 과거의 민족주의와 그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박정희에 대한 비난과 격하시도는 일정한 목적과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 대중의 통합이 박정희같은 자주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면 안된다는 의도가 숨어져 있는 것이다.
기획자의 의도를 읽지 못하면, 그들이 원하는대로 움직이고 행동하게 된다. 박정희에 대한 일련의 격하시도는 한국대중의 단결과 단합을 방해하기 위한 교묘한 의도가 작동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 의도를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면 자신의 지적 능력을 의심해야 할 것이다.
어떤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상황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 단재 신채호에게 묘청은 가장 민족적이고 혁명적 인물이었고, 김부식에게는 역적에 불과했다.
우리는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새롭게 해야 한다. 그것은 과거가 아니라 우리가 지향해야할 미래를 위해서다. 미래를 위해서 그 인물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할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과거에 매몰되어 누군가의 기획에 따라 움직이는 괴뢰가 될 것인가?
반미 반제국주의를 주장하는자들이 박정희를 비난하는 것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들이 한국을 붕괴시키고 조선을 중심으로 통일하자고 한다면 그들이 박정희를 비판하는 것이 틀리지 않다. 나는 그런 자들과는 대화하고 싶지 않다. 무책임한 역사적 카오스를 초래하는 것은 역사적 범죄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박정희를 재평가하고 김일성과 역사적 화해를 시도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