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0-22 프랑스 소요사태의 정치경제학적 의미와 신민족주의의 필연성steemCreated with Sketch.

프랑스의 소요사태는 유럽의 인근 국가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도 심각한 소요가 벌어지고 있으며, 포르투갈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번 소요사태의 특징중 하나는 이념적 지향이 아직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소요사태의 핵심적인 이유가 생활고라고 한다면 당연히 사회주의적 이념과 주장이 난무해야 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그런 경향이 보이지 않는다. 프랑스에서는 좌파 정당이 지금의 소요사태에 올라타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그리 여의치 않은 것 같다.

이런 상황은 매우 중요하다. 앞으로 역사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를 진단하고 전망하는데 중요한 관점을 제시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린 결과 지금과 같은 파괴적인 소요사태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적 이념적 지향이 제시되지 않는 것은 두가지 이유 때문이 아닌가 한다.

첫째는 기존의 유럽식 사회민주주의가 실패했다는 것이다. 기존의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소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본주의의 전위적 역할을 했다. 자본주의는 유럽식 사민주의가 주장하는 다양한 이념적 지향을 이용하여 실제 사회주의가 주장했던 생산수단의 국가와 사회의 점유에 관한 주장을 봉쇄해버렸다는 것이다. 소위 기후정의, 정치적 올바름(비록 미국에서 비롯되었지만, 유럽의 사민주의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젠더 문제 등등을 통해, 대중의 관심을 경제에서 정치로 전환시켜 버린 것이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모순은 경제적 불평등을 통해 누적된다. 그동안 유럽의 사민주의는 은폐된 경제적 불평등과 모순을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더 이상 그 효용을 상실한 것이다.

대중은 더 이상 사민주의에 기대를 걸지 않으며, 사회주의도 그 연장선상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유럽의 대중들이 사회주의와 같은 과거의 이념적 지향도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사회주의는 소련과 중국 그리고 동구에서 실시되었고 실패했다. 이미 실패한 사회주의와 같은 이념을 더 이상 추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평가가 가능한것이다.

이미 진정한 사회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회주의 국가는 조선과 쿠바이다. 쿠바는 이미 자생력을 상실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조선은 지금도 그 가능성을 그대로 시험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역사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버전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과 러시아는 이제 국가독점자본주의 혹은 국가자본주의라고 불리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이미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고, 그들의 경쟁력은 기존의 미국적 자본주의보다 더 역사적으로 진보한 형태를 띠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적 자본주의는 자본의 극단적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목적에서만 강력한 국가적 역량을 인정한다. 미국이 전세계를 주무를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군사력, 그리고 전세계 국가의 정부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정보력과 공작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미국의 자본에게 최상의 자유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미국에서 시민적 자유란 자본의 자유가 침해받지 않는 경우에만 보장되었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는 국가의 힘이 자본에게도 직접 미친다. 자본은 정치의 하부에 위치하는 것이다. 국가권력이 자본의 운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결정하는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에서 자본의 주인은 국가이며, 러시아에서 자본의 주인은 자본가인 것이다. 중국이 스스로를 국가자본주의 혹은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이유인 것이다.

문제는 중국과 러시아적 국가가 미국의 국가보다 훨씬 더 경쟁력이 있다는 것이다. 자본의 자유를 무한정하게 허용하는 것이 오히려 국가 전체의 자본에 있어서는 엄청난 비효율성을 노정한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 미국적 자본주의다.

지금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에게 패배하는 것은 바로 미국적 자본주의가 중국 및 러시아적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벌어지고 있는 혁명적 소요사태에서 사회주의의 이념이 제기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이제 과거와 같은 사회주의로의 복귀자체가 무의미하고 불가능하며, 역사적으로 진보적이지 않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파악해야 할 것은 소위 중국과 러시아가 주장하고 있는 다극적 질서라는 것이 결국은 국가독점자본주의하에서의 국제질서를 의미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위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의 다극적 질서가 어떤 내용을 지니게 될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중국과 러시아는 국제법과 유엔의 정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여전히 제2차 세계대전이후의 질서가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제2차 대전이후의 국제질서라는 것이 결국은 은폐된 제국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이며, 그 정점에 미국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패권이 붕괴한다는 것은 정점에 있는 국가가 여러개이며, 은폐된 방식의 제국주의는 그대로 잔존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국과 러시아가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러시아는 이미 러시아민족주의를 공공연하게 선언했다. 푸틴 체제의 사상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두긴은 전형적인 대러시아 민족주의자이다. 심지어 스탈린도 일국사회주의를 추진할때 러시아 민족주의를 동원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중국이 추구하고 있는 중화민족이란 것도 바로 중국이 실제적으로는 민족주의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화민족이란 중국내 소수민족을 모두 포함하여 하나의 거대한 문화적 범위의 민족을 만들어 가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중국이 한민족의 전통문화를 중화민족의 문화로 포함시키는 작업을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중국내 조선족은 소수민족 중에서 매우 단위가 크고 민족적 문화가 독특하다. 중화민족을 추구하는 중국의 입장에서는 이런 조선족의 문화를 중화민족으로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흔히 중국이 한민족의 고유문화를 자신의 문화로 훔쳐 간다고 생각하는데, 중국의 입장에서는 이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이다. 만일 중화민족의 문화에서 조선족의 문화를 포함시키지 못하면 중화민족이란 개념 자체가 허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다극적 질서의 배후에는 이미 각자 도생을 위한 민족주의적 경향이 지배적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정치경제적 영역이 넓어져야 한다. 필자가 신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하여 신민족주의는 영호남을 아우르고 남북을 넘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한국은 지정학적 격변으로 인한 새로운 질서가 고착되었을때 더 이상 생존하지 못한다. 필자가 2-3 세대 동안 지금의 상황에서 탈피하지 못하면 한국이 조선에 흡수통일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조선은 상승하고 있고, 한국은 앞으로 하강하는 국면이다. 지금의 한국이 하강하게 되면 날개가 없이 추락하는 수도 있다. 동력을 상실하면 추락하는데 지금 한국은 동력을 상실하고 있다. 동력을 상실하는 정도가 아니라 동력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와 유럽도 지금의 소요사태를 통해서 새로운 정치경제학적 질서를 창출하지 못하면, 제3세계로 전락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게 되면 유럽은 다시 제2의 중세라고 할 수 있는 암흑기로 진입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미 그런 경향이 보이고 있다. 유럽은 여전히 진정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만들지 못했다. 아직 유럽은 근대를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유럽의 분열은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의 범위를 넘어서 지방적인 수준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동아시아 특히 한국과 중국 일본과 같이 오래전에 국가가 완성된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한국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동서가 화해해야 한다. 그리하여 영남은 김대중을 받아 들이고, 호남은 박정희를 인정해야 한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서로 변증법적 통일을 이루지 못하면 새로운 역사를 창출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최근의 한국사회에서 영화 암살자(들)로 인한 역사해석의 퇴행적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 매우 우려스럽다. 필자가 주장하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변증법적 통일은 한국이 지속가능한 성장과 민족문화의 발전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이런 필요조건을 달성하지 못하면 한국의 미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영화 암살자(들)로 인한 퇴행적 경향은 민족문화의 발전을 거부하는 심각한 분파주의의 일환이라고 하겠다. 일전에 그람시의 옥중수고에서 분파주의를 규정한 대목을 보았다.

그람시는 분파주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분파주의자들은 내부적인 사소한 사건을 놓고도 흥분하는데 그것은 그 사건이 그에게는 어떤 비장한 뜻이 있는 것이어서 그로 하여금 신비적인 열광주의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마치 최근 소위 진보진영에서 벌어지고 있는 박정희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이 얼마나 민족의 발전이라는 진보적 방향에 역행하는 퇴행적 분파주의라는 것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하기는 어렵다고 하겠다.

프랑스의 최근 소요사태는 앞으로 전세계적인 정치경제학적 변화가 어떻게 전개될지 나름의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필자가 읽고 있는 세계사의 움직임이 맞을지 아닐지는 시간이 가기전까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필자는 이미 그런 경향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평가하고 판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