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0-26 단둥에서 확인된 조중 관계의 전략적 재편, 정태현 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이례적으로 국경을 넘어 중국 단동의 항미원조기념관을 찾았다는 소식이 크게 보도됐다. 시진핑 주석이 아닌 왕후닝이 김 위원장을 맞았다는 이유로 조선에 대한 중국의 우위가 커진 것 아니냐는 논평도 나왔다. 왕후닝이 누군지 제대로 모르고 하는 소리다.
왕후닝은 중국공산당 권력 서열 4위이자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며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이다. 겉으로는 정치 자문기구의 수장처럼 보이지만, 장쩌민부터 후진타오, 시진핑에 이르기까지 중국공산당의 이념과 정책을 설계한, 그야말로 핵심 인물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이런 인물과 단동에서 만났다는 사실은 조선과 중국이 서로의 정치적, 이념적, 전략적 의지를 재확인한 사건으로 봐야 한다.
이 만남은 갑자기 이루어진 게 아니다. 2025년 9월 3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의 전승절 80주년 기념 열병식에 참석해 시진핑 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나란히 입장했다.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맞서는 세 나라의 정치적 연대를 세계 앞에 보여준 장면이었다. 조선의 지도자가 중국의 최대 국가 행사에 초청받아 중러 지도자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사실 자체가 조중 관계가 과거의 의례적 우호를 넘어 전략적 협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줬다.
답방은 2026년 6월 8일부터 9일까지 이어졌다. 시진핑 주석은 2019년 6월 이후 7년 만에 평양을 국빈 방문했다. 올해 첫 해외 순방지로 평양을 선택했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김일성광장 환영식과 금수산 영빈관 정상회담, 환영 만찬과 예술공연 관람까지 모든 일정에 정치적 메시지가 담겼다. 중국은 조선을 주변의 문제 국가로 취급하지 않았다. 아시아의 안보와 발전을 함께 논의할 당과 국가로 대우했다.
시진핑 주석이 내놓은 의제도 구체적이었다. 외교와 법집행, 군대 분야의 교류를 강화하고 국경 통상구를 정상화하며 민항 노선과 국제 여객열차 운행을 재개하자고 했다. 경제·무역과 농업, 건설, 과학기술, 의료보건 협력도 제안했다. 조중 관계가 정치적 구호나 상징적 우의에 머무르지 않고 국경 물류와 교역, 인적 왕래, 기술 협력 등 실질적인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더 주목할 점이 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조중 간 주요 접촉과 중국 측 발언에서 한반도 비핵화나 조미 대화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2019년 정상회담과 비교하면 달라진 지점이다. 양국은 한반도 문제를 미국이 설정한 비핵화와 제재의 틀 안에서만 다루지 않는다. 대신 주권과 안보, 발전 이익을 수호하고 지역의 평화를 함께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조선은 문제이고 중국은 그 문제를 관리하는 나라'라는 서방의 낡은 구도가 흔들리고 있다.
시진핑 주석의 평양 방문에 이어 왕후닝도 조선을 찾았다. 2026년 6월 평양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난 것이다.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중요한 신호였다.
왕후닝은 단순한 정협 주석이 아니다. 1995년 베이징으로 올라간 뒤 중앙정책연구실에서 약 25년간 일했고, 2002년부터는 주임을 맡았다. 이곳은 당 지도부의 정책과 이론을 만들고 주요 문서와 연설을 다듬는 핵심 기관이다. 장쩌민의 '3개 대표론'과 후진타오의 '과학발전관' 정립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공산당의 이념적 두뇌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2017년 제19기 당대회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됐고, 2022년 제20기 당대회에서도 유임돼 당 서열 4위 자리를 지켰다. 2023년 3월에는 제14기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으로 선출됐다. 정협은 공산당과 8개 민주당파, 각계 단체 및 소수민족 대표 등이 참여하는 최고 정치협상기구다. 하지만 왕후닝의 진짜 무게는 직함이 아니다. 시진핑 사상을 비롯한 중국공산당의 공식 이념과 정책을 만들어왔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런 왕후닝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난다는 건 무엇을 뜻할까. 조중 양국이 경제 협력만이 아니라 이념과 통치, 정치적 신뢰의 문제까지 논의할 수 있는 관계라는 뜻이다. 무역 계약과 물자 수송, 통관 절차는 실무 부처가 처리하면 된다. 철도와 항공 노선을 재개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떤 정치적 원칙을 지키고 미국과 서방의 압력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논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최고 지도부 간의 신뢰가 필요한 문제다. 중국에서는 왕후닝이 바로 그 사람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2026년 10월 24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단동 방문이 이루어졌다. 김 위원장은 평양을 출발해 신의주를 거쳐 신압록강대교를 건너 랴오닝성 단동에 들어갔다. 1년여 만의 방중이자 당일치기 일정이었다.
방문지는 항미원조기념관이었다. 다음 날인 10월 25일이 중국의 항미원조기념일이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기념일을 하루 앞두고 기념탑에 화환을 바치며 중국인민지원군 전사자들을 추모했다.
김 위원장은 이번 방문이 역사적 시기에 생명과 피로 조선을 지원한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들을 추모하고, 항미원조 영웅들에게 조선의 감사와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친필 문구가 담긴 역사 사진도 기념관에 기증했다. 화환에는 '중국인민지원군 렬사들을 영원히 기억할것이다. 조선로동당 총비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 김정은'이라는 문구가 적혔다. 조선과 중국의 관계가 1950년대 미국의 군사적 압력에 맞서 함께 싸운 혈맹의 역사로 회귀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정의 중심에 왕후닝이 있었다. 항미원조기념관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직접 영접하고 전 일정을 함께했다. 기념탑 헌화와 기념관 참관에 이어 회담을 가졌고, 오후에는 단동의 자동차 공장도 함께 시찰했다. 마지막에는 신압록강대교까지 나와 김 위원장을 배웅했다. 영접부터 회담과 현장 시찰, 배웅까지 이어진 일정은 중국 측이 이번 방문에 상당한 정치적 무게를 부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시진핑 주석이 직접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국이 조선을 낮춰 대우했다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외교를 서열표 하나로 읽으니 이런 결론이 나온다.
왕후닝은 당 서열 4위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다. 시진핑 주석의 안부와 축원을 직접 전달했으며, 시진핑 체제의 핵심 정책 설계자이기도 하다. 중국이 그를 보냈다는 건 당 대 당의 정치적 신뢰와 전략적 소통을 강조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당초 리창 총리가 접견할 예정이었다가 왕후닝으로 바뀌었다는 정보당국 관계자의 설명까지 고려하면 이번 접촉에 부여된 무게는 상당하다.
왕후닝은 회담에서 이번 방문이 조중 전통 우의를 계승하고 정치적 상호 신뢰를 심화하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9월과 올해 6월 양국 정상의 상호 방문에서 이룬 합의를 이행하고, 신압록강대교 개통을 계기로 인적 왕래와 경제·무역 협력을 확대하겠다는 뜻도 전했다.
두 가지 메시지가 분명하다. 조중 관계가 정상 간 합의를 바탕으로 제도적 틀을 갖추었다는 것, 그리고 이제 그 합의를 실질적인 협력으로 옮기려 한다는 것이다. 신압록강대교는 그 상징이자 실질적인 통로다. 양국 접경 지역의 물류와 인적 왕래, 무역과 관광, 지역 경제 협력을 뒷받침할 기반이다. 중국이 이 다리를 앞세워 협력 확대를 강조한 것은 조선과의 연결을 강화하겠다는 뜻이다.
조선이 중국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국제 제재와 군사적 압박 속에서 경제적 통로와 외교적 지지 기반을 확보해야 한다. 중국은 조선과 국경을 맞댄 이웃이자 에너지와 물자, 시장, 운송로를 제공할 수 있는 중요한 상대다. 중국 역시 조선이중요하다.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미국의 군사적 존재가 확대되고 미일한 동맹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조선은 중국의 안보 환경과 직결된다. 양국의 이해가 맞닿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상호 필요에 바탕을 둔 전략적 협력이 강화되는 이유다.
물론 조중 관계가 언제나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중국은 조선의 핵개발에 반대했고, 유엔 대조선 제재에도 동참했다. 양국 사이에 이견과 갈등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관계가 끊어지지 않은 것은 국경을 맞댄 이웃이라는 현실과 서로의 전략적 이해가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1950년대 중국인민지원군은 압록강을 건넜다. 그리고 2026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다시 압록강을 건너 그들의 희생을 추모했다. 그 사이에 수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조중 관계를 지탱하는 역사와 지정학적 조건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왕후닝이 단동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맞이한 사건은 혈맹이라는 과거의 상징을 되살리며, 양당과 양국이 이념적, 정치적, 전략적인 소통에서 한단계 더 높은 수준에 올라섰음을 보여준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