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위쪽 칸의 안 읽은 책들
책장 위쪽 칸에는 안 읽은 책이 모여 있습니다.
이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건지, 어느 시점부터 의식적으로 그렇게 한 건지는 기억이 안 납니다. 손에 잘 닿지 않는 위쪽 칸에 안 읽은 책이, 손이 잘 가는 중간 칸에 읽고 있는 책이, 그 아래 칸에 다 읽고 다시 볼 일 없는 책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위쪽 칸을 세어보면 30 권이 좀 넘습니다.
이 책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살 때는 분명히 읽을 생각으로 샀습니다. 인터넷에서 누군가가 추천했거나, 어떤 책의 참고문헌에서 봤거나, 서점에 갔다가 표지가 끌렸거나. 어떤 책은 1 년 전에 산 것이고, 어떤 책은 3 년이 넘었습니다. 한 권 한 권을 보면 다 합리적인 이유로 샀습니다. 모아서 보면 30 권을 안 읽고 있는 사람의 책장이 됩니다.
그 사이에 다른 책들은 읽었습니다.
위쪽 칸의 30 권을 안 읽는 동안 중간 칸과 아래 칸을 거쳐 나간 책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어느 시점에 어떤 책이 손에 들어왔고, 그 책이 위쪽 칸을 거치지 않고 바로 중간 칸으로 들어와서 며칠 만에 다 읽힌 다음 아래 칸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는 동안 위쪽 칸의 30 권은 위쪽 칸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 비대칭이 어디서 오는지를 생각해봅니다.
위쪽 칸의 책들은 한 번에 다 못 읽는 책들입니다. 두꺼운 책들이 많고, 주제도 무거운 쪽입니다. 손에 들면 한 달은 잡고 있어야 하는 느낌이 옵니다. 그 한 달을 다른 일들 사이에 끼워 넣을 자리가 잘 안 생깁니다. 그래서 손에 잡힐 때마다 "조금 더 시간이 있을 때 봐야지" 라며 다시 위쪽으로 올려둡니다. 시간이 더 있을 때라는 게 매주 오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들어오는 새 책들은 가볍습니다.
서점에서 산 책은 표지가 끌릴 때가 많고, 표지가 끌리는 책은 대체로 가볍게 읽히는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들어오면 며칠 안에 읽힙니다. 위쪽 칸의 무거운 책들은 그 며칠을 매번 못 차지합니다. 가벼운 책이 무거운 책의 시간을 매주 가져가는 흐름이 한 해 동안 30 권을 쌓아둔 셈입니다.
이 흐름이 portfolio 운영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납니다.
오래 잡고 있어야 결과가 나오는 작업은 매주 미뤄집니다. 며칠 안에 끝나는 가벼운 작업이 매주 그 시간을 차지합니다. 가벼운 작업의 결과가 매일 나오니까, 일하고 있다는 감각은 유지됩니다. 무거운 작업의 결과가 한 달 뒤에 나오는 것과, 가벼운 작업의 결과가 매일 나오는 것은 같은 결과로 보이지 않습니다. 매주의 시간 분배는 가벼운 쪽으로 자동으로 끌려갑니다.
위쪽 칸의 책들을 한 권씩 옮겨보려는 시도를 몇 번 했습니다.
손이 잘 가는 중간 칸으로 한 권을 내려놓으면, 며칠 안에 그 책이 다시 위로 올라가 있습니다. 같은 자리에 두어도 매일 다른 책에 밀립니다. 위치를 옮긴다고 읽히는 게 아닙니다. 위치는 결과가 아니라 원인 쪽에 있고, 진짜 원인은 그 책에 한 달을 줄 수 있는 시간을 일정에 박아둘 의지인 듯합니다.
그 의지가 매주 잘 안 박힙니다. 책 한 권에 한 달을 떼어주는 일이, 운영의 매일에서는 사치처럼 보입니다. 사치라는 단어가 적합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치에 가까운 무엇입니다.
위쪽 칸을 올려다보면서 한 가지를 다시 적어둡니다. 30 권은 책장의 상태가 아니라 제 시간 분배의 누적 결과입니다. 책장이 30 권을 안고 있는 게 아니라, 제가 한 해 동안 가벼운 쪽에 시간을 매주 내준 흔적이 30 권의 모양으로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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